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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징비록 그리고 이옥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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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징비록 그리고 이옥봉
  • 경도신문
  • 승인 2016.02.1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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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懲毖錄)은 조선조 선조(宣祖)때의 대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선조 25년(1592)에서 동 31년(1598)까지 7년간의 일어난 사실에 관해 기술한 일종의 수기(手記)이다.

징비록(懲毖錄) 상하 2권, 근 포록(芹曝錄) 2권, 진 사록(辰巳錄) 10권,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 총16권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 전개, 과정 및 전황(戰況) 등을 기술한 것으로 저자가 작성한 관계 문서를 붙였고, 징비록의 추가 기록인 녹후잡기(錄後雜記) 1편을 첨부했다.
근 포록에는 선조 25~26편의 장계(狀啓)를 모아서 넣었고 군문등록에는 선조 28~31년간 저자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을 때의 문 이류(文移類)를 수록했다.

인조(仁祖) 11년(1633) 저자의 아들 유진(楡珍)에 의해 서애집(西厓集) 일부로 간행됐으며, 그 후 16권으로 따로 간행했다.

숙종(肅宗) 21년(1695) 일본 교토(京都)에서 중간(重刊)됐다.

그 후 1936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경상북도 안동(安東)군 풍산(豊山)면 하회(下回)리의 종가(宗家) 소장본인 저자의 자필사본(自筆寫本)을 영인, 초본(草本) 징비록이라 해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1집으로 간행했다.

현재 16권 7책, 인본이 있다.

임진왜란 후 저자가 은퇴해 시골에 있을 때 저술한 것이며, 책 이름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編)의 ‘예기징이비후환(豫基懲而毖後患)’이란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조선조 때의 풍자소설(諷刺小說)로 ‘징세비태록(徵稅毖態錄)’이 있는데,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남의 부인을 탐내다가 도리어 자기의 딸을 그 여자의 동생에게 주게 된다는 해학적 줄거리이다.

간단히 말해서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유성룡이 도체찰사(都體察使) 겸임진(臨陳)지휘자로서 활약하다가 파직되어 낙향해서 지은 책이다.

임진왜란의 원인, 진전, 전황 등 수난상(受難相)을 수기(手記)형식으로 기록한 중용한 사료(史料)이다.

징비는 사전적인 의미로 ‘전과(前過)를 뉘우쳐 삼감’이다.

징(懲)은 ‘혼날, 응징할, 혼이 나서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침’이다.

징분질욕(懲忿窒慾)은 분(忿)한 생각을 경계하고 욕심을 막는 다는 것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선조 때의 명상(名相)인데 자는 이혤(而現), 호는 서애(西厓)이다.

이황의 제자로서 과거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권율 같은 명장을 천거했으며, 도학, 문장, 덕행, 서예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에 ‘징비록’, 문집(文集)’, 신종록(愼終錄)’ 등이 남아 있다.

이옥봉(李玉峯)은 조선 시대의 여류시인,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 이봉(李鋒)의 서녀(庶女)였다. 운강(雲江) 조원(趙瑗)의 부실(副室)인데, 임진왜란 때 순절했다.

시에 능했다고 한다. ‘가림 세고(嘉林世稿)’에 35편의 한시(漢詩)가 전해지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한시(漢詩)는 제목이 ‘의루(倚樓)’인데 ‘다락에 기대어서’ 로 옮기고 전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깊은 감정을 글로 써 부치기는 쉽지만
정작 말로써 표현할 땐 새삼 부끄러우네.
향기 있는 안방을 묻는다면
흐트러진 화장으로
홀로 다락에 기대 있네.’

의문의려(倚門倚閭)는 자려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의려지망(倚閭之望_)이나 의문이망(倚門而望)과 같은 뜻이다.

또 의마재(倚馬才), 의마칠지(倚馬七紙)는 말에 기대서서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만언(萬言)의 문장을 지었다는 진(晋)의 원호(遠虎)의 옛 일에서, 탁월한 문재(文才)를 이르는 말이다. 팔두재(八斗才)와 같은 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 선조 25년 (1592)에 일본이 조선에 침범해 일으킨 난리이다. 해상에서는 명장 이순신(李舜臣)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육상에서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의 연패로 선조는 의주로 파천(播遷)했다.
 
일군(日軍)은 선조 30년(1596)에 재침해 전후 7년간이나 끌다가 동 31년에 물러갔다.

나 경 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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