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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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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의의
  • 경도신문
  • 승인 2016.01.1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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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은 실제로 소용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고려 말기에 들어온 주자학과 조선시대의 도학을 말한다.

우주의 원리로 이기의 2원을 인증하고 다시 태극의 1원에 귀일해 일체의 현상을 설명했는데 심·성·정은 물론 실천 도덕에 이르기까지의 이론을 세워 인생문제의 해결과 아울러 여말의 퇴폐한 사회를 구제해 보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곧 신흥국가인 조선조의 국시로 됐으며 포은 정몽주를 시조로 해 야은 길재와 점필재 김종직의 학통으로 점점 발달해 정암 조광조에 이르러 형성되고 다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러 집대성 돼 대성됐다.

실학은 실사구지학이란 말의 요약으로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이다.
 
즉 종래의 공리공담이 주로 된 도학과 주자학의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의 세계에서 온갖 민생문제와 사회문제를 참다운 이상과 방법으로서 해결해 다 같이 행복 된 생활을 하자는데 그 뜻이 있으며 이것이 한국 신학의 특징인 동시에 이상이었다.

어원은 전 한서에 서한 경제의 아들 헌 왕이 현실적인 학문을 연구 발전시켰으므로 수학호고, 실사 구시한다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중국에서 실학으로써 학풍이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 서구과학의 전래와 청나라 초기의 고증학풍이 일어나면서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세웠다.

수학이란 학업을 닦는 것이고, 호고는 옛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온고, 옛 것을 익히는 것, 또 옛 것에 통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어’의 위정 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옛 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지신과 통한다.

우리는 항상 온고지정을 가지고 있다.

즉 옛 것을 살피고 생각해 그리는 정이다.

실사구시는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공론을 일삼는 양명학에 대한 반동으로 청조의 고증학파가 내세운 표어로, 문헌학적인 고증의 정확을 존중하는 과학적이고 객관주의적인 학문적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청조 고증학과 실학은 한족들이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 정복된 민족문화운동 또는 경전재정리로 청조타파와 한족국가의 재흥을 기도한 민족적 사상과도 일맥상통하고 합류된다고 할 수 있다.

실학파는 조선조 중엽에 일어난 실학주의의 일 학파이다.

헛된 이론을 버리고, 사실을 추구해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학문을 주장했다.

고려 말에 중국에서 전해온 성리학은 그 사이에 많은 발전을 보였으나 일상생활과는 먼 거리감이 없지 않았고, 임진과 병자의 난을 겪고 난 국민은 때마침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아들임으로써 학계에 큰 변동을 일으켰다.

곧 정치·경제·천문·지리·어학 등 부문에서 유형원을 비롯해 이수광·정약용·이무·박지원·신경준 등의 학자가 동시에 일어나 실용적인 학문을 다투어 주장했다.

이들의 대표적인 저서는 이익의 성호새설, 정약용의 목민심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신경준의 훈민정음언해, 박지원의 연암집,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등이 있다.

실학주의는 교육사상에서의 리얼리즘의 역어인데 인문주의의 대가 된다.

르네상스에 있어서 복고주의에 치우친 나머지 고전 암기나 문법기억 등 형식주의가 성행한 데에 대해 반동으로 일어났으며, 17세기에 와서 과학의 흥륭과 철학적 경험론의 영향으로 사실과 자연과학에 치중하게 됐다.

프랑스의 풍자 작가 라블레와 영국의 시인 밀턴에 의해 대표되는 언어적 실학주의가 있는데, 이는 고전을 교재로 채용하면서 실생활에 십분 이용하는 것이다.

또 프랑스의 수필가·사상가 몽테뉴에 의해 대표되는 사회적 실학주의는 실생활의 경험에 의한 학습을 말한다.

3가지 중에서 마지막으로 감각적 실학주의가 있는데, 이는 라트케와 코메니우스에 의해 대성된 것인데 자연과학과 감각, 즉 지식이라는 경험론이 융합된 것이다.

18세기에 한때 잠깐 쇠퇴했으나 19세기에 자연과학과 산업의 발흥에 따라 다시 주장되었으며 이때의 철학적 대표자는 누가 뭐라 해도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였다.
 
중국철학의 용어로 정착된 실사구시는 사실에 대해 시, 즉 정확한 답을 구하는 것이다.
하간허왕전 에 나오는 말로서 청조고증학파의 슬로건 이었다.

청초의 황종희와 고염무 등이 명말 양명학파의 공론에 반대해 실증 학을 일으켰는데 이에 이어서 많은 고증학자가 나와 고전해석에 실증주의를 주장하고 나왔다.

고전의 진위해명, 문자의 정확한 해석 등에 공헌이 컸으나 후에는 결국 문헌학의 테두리 안에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사상은 조선조 중엽에 한국에 수입되어 임진과 병자의 양대 국난을 겪은 이 나라를 개혁해 보려는 영정와 그 시대의 젊은 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위대한 실학파의 학풍을 일으켰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유교 이 외의 실생활에 유익한 것을 목표로 한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문학이 바로 실학파문학이다.

실학에는 3파 즉 경세치용학파·이용후생학파·실사구시학파가 있는데 그 중 이용학파는 물질문학의 향상에 많은 관심과 영향을 나타냈다.

그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의 생활양식을 실제로 현지에서 보고 각성한바 많아, 문명의 진수를 이해했고, 인간 본능의 긍정과 감정의 충족을 추구했다.

그들의 문학은 당시와 당송고문을 모범으로 삼아오던 사대부의 정통문학의 낡은 색조와는 정 반대로 충돌했다.

그 대신 신선한 구상과 평 이한 사실적 수법으로 시와 산문을 독창적으로 창작했다.

또한 한국의 속담이언을 자유로이 표현하고 풍자와 해학으로 서민적 정취를 십분 섭취해 한국의 한 문학상 하나의 새로운 유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지원이며 이덕무와 박제가 등이 그 뒤를 이어 나왔다.

나 경 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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