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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역사와 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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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역사와 준동
  • 경도신문
  • 승인 2016.04.1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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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倭), 왜국(倭國)은 고대 중국에서 일본을 가리키던 비하(卑下)의 명칭이다.

‘한서(漢書)’ 이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송서(宋書)’ 와 ‘수서(隨書)’ 등에서 간혹 찾아 볼 수 있다.

왜관(倭館)은 조선시대 세종(世宗)때 제포(薺浦;乃而浦)·염포(鹽浦)·부산포(釜山浦)등의 삼포를 개항하면서 일본인의 거주(居住)와 통상(通商)등을 위해 두었던 관사 또는 그 구역을 지칭한다.

삼포왜란(三浦倭亂) 뒤 중종 7년(1512)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고 제포에만 두었는데 중종 36년(1541) 이곳에서 또 한국 관병(官兵)과 충돌이 자주 생겨서 제포에 거주하는 왜인을 즉시 모두 내쫓았다.

그리고는 그 후 왜관을 부산진(釜山鎭)에 옮겼다.

이후 숙종(肅宗) 4년(1678) 초량(草梁)으로 다시 옮기고, 그들의 개시(開市)는 그곳 정주(定住) 왜인으로서 동래부(東萊府)의 확인을 얻은 자에 한했다.

또한 관헌(官憲)의 감시 아래 매월 6차(五日場) 행하게 했다.

왜관은 주위에 왜성(倭城)을 쌓았고, 그 안에는 거류민 공청(公廳)·시장·상점·창고 등이 있었다.

경상북도 칠곡(漆谷)군의 군청소재지가 왜관(倭館)이다.

군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부선(京釜線)의 한 역(驛)이고 낙동강 상류의 종점이며 대구(大邱)시 서북 37.3㎞에 위치하고 있다.

1949년 8월 13일 읍으로 승격됐으며, 읍의 동남일대는 평야로서 토지가 비옥하고 따라서 농산물이 잘됐다.

특히 담배와 사과의 재배가 적당할 뿐 아니라 대구사과의 원조 생산지를 이룬다.

이와 관련해 왜관무역(倭館貿易)은 조선조 때 왜인과 장사하던 일이다.

왜관은 당시 동래부(東萊府)에 있는 대마도 대관(代官)의 집으로서 일본상인과 조선 상인이 이 왜관부근 대청(大廳)에서 만나서 서로 물건을 매매했다.

왜관의 조선 상인은 인정받은 30명에 한해 무역을 할 수 있게 했다.

이 30명 중에는 대표격(代表格)인 행수(行首)가 있어서 각각 자치적으로 통솔해 나갔다.

또한 ‘왜어유해(倭語類解)’는 조선조 후기의 과시용(科試用)으로서 사용된 일종의 일본어 학습서이다.

천문(天文)·시후(時候:사시(四時)의 절후)·간지(干支:천간과지지)·지리 등 65부로 분류해 한자(漢字) 어휘를 적고, 그 아래 오른쪽에 한글로 국어의 훈과 음을, 왼쪽에는 한글로 일본 자음을 적었다.

그 아래 인(印)을 하고 그 음에 대한 일본어를 한글로 주음(注音)했으며 총 어수(語數)는 책 끝에 부록으로 실린 구결(口訣:한문의 각 구절 끝에 다는 토)까지 합해 3,409어에 달했다.

홍순명(洪舜明)이 편찬했다고 전한다.

‘왜사일기(倭使日記)’는 조선조의 고종(高宗) 12년(1875)부터 고종 17년(1880)까지의 일본의 사신(史臣) 왕복에 관한 일종의 교섭기록이다.

본서는 병자조약(丙子條約)의 체결, 조규비준서(條規批准書)의 증답(贈答)과 조규부록, 무역장정(貿易章程)의 검인(檢印), 일사주경(日使駐京), 개항지(開港地) 선정 및 측수(測水:물의 깊이를 헤아려 잼) 등에 이르는 조일(朝日)교섭 전반에 걸친 세부적인 기록이다.

왜구(倭寇)는 14세기 말엽부터 16세기에 걸쳐 한국에서 중국연안 일대에까지 약탈을 일삼던 일본의 해적(海賊)을 말한다.

넓게는 13~16세기에 중국과 우리나라 근해(近海)를 항해하며 약탈을 일삼든 일본 해적을 총괄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피해와 방어(防禦)에 적지 않게 시달렸다. 한국에서 더욱 심한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부터였다.

이후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침구(侵寇)가 계속돼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 조선을 세운 것도, 그의 이 왜구 토벌(討伐)의 공적에 한 가지 큰 이유를 붙일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명(明)나라가 오랫동안 침구(侵寇)를 당해 오다가 척계광(戚繼光) 등이 나와 명 말에 잠시 평정됐다.

그러나 왜구의 정체는 일본의 부랑유민(浮浪流民) 층들과 긴밀히 결탁했다고 한다.

또는 부분적으로는 중국과 한국에서도 왜구의 탈을 쓰고 약탈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16세기 경 일본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가자 또 다시 왜구가 창궐(猖獗)했다. 전자의 왜구를 전기(前期)왜구라 하며, 후자를 후기왜구라 분류 한다.

이때 일어난 왜구는 전기보다 훨씬 대규모로 진전돼 동양제국의 연안 일대에 걸쳐서 수시로 침략하고 약탈했다.

일본에서는 전국의 혼란이 평정되고, 봉건질서(封建秩序:Feudalism)가 안정되자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됐고 따라서 그 활약은 결국에는 마비됐다.

왜구의 출몰은 일본 국정(國情)이 좌우되는 것이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왜노비(倭奴婢)란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얽매어 노비로 사용된 자들을 말한다.

고려 말기부터 한국연안에 왜구(倭寇)의 위협이 극심했기 때문에, 조정(朝廷)에서는 왜구의 격멸과 더불어 포로를 잡아 나라에 바치는 것을 장려해 왔다.

이렇게 잡혀온 왜인들은 성별 및 연령에 따라 분류해 각기 다른 처벌을 가했다.

성년남자는 대개 죽였고, 그 외에 자들은 각 벼슬아치들에게 분여(分與:나누어 줌)해 노비로 삼았다.


나 경 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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