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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평가제를 도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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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평가제를 도입하자
  • 경도신문
  • 승인 2015.07.1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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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는 교통사고를 냈다.


그날은 마침 초복 날이었는데 새벽에 일어나 책 교정 작업을 마친 나는 인쇄소에 빨리 책을 넘기고 직원들과 삼계탕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운전자의 전방주시 의무를 태만히 한 채 부주의로 보행자신호를 보지 못하고 그만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있는 행인에게 승용차 앞 범퍼로 충격을 가해 쓰러뜨렸던 것이다.

다행히 서행하고 있었으므로 피해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상황을 판단하고 피해자를 근처 병원 응급실로 후송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보험회사에 전화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 후 나는 병원 안 휴게실에서 피해자가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노심초사하며 여러 가지 검사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경찰이라며 전화가 왔다.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병원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했더니 응급실 안에서 경찰이 나왔다. 피해자가 교통사고 사실을 경찰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그 경찰은 조서를 꾸며야 한다며 인근 경찰서 교통조사과로 와달라고 했다. 점심때라 허기를 느꼈으나 금방 끝나려니 하고 경찰서로 출석했다. 그런데 조서를 꾸미는 시간에 무려 세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내가 피의자라 할지라도 밥은 먹었느냐 물어보지 않았다. 오후 세시가 되어서야 나는 조서를 마치고 경찰서 문을 나올 수 있었다.


조서를 꾸미며 나는 완전히 현행범 취급을 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경찰관은 패기에 넘쳐 있었다. 경찰관이야 근무규칙에 따라 바르게 근무하고 있었겠지만 공연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거짓을 말할 필요도 거짓 진술을 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솔직하게 시인했다.
나는 지금껏 대한민국의 선량한 모범시민으로 살아왔다고 자처한다.
나는 단 한 번 경찰서에 드나든 적도 없었고, 누구와 싸움을 하거나 세금을 탈루한 적 없는 대한민국의 모범 시민이라 자처하는 사람이다.
내게 조목조목 물어 신원을 조회한 경찰관도 나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화가 난 것일까? 얼마 전 나는 연신 내 사거리에서 음주 운전으로 내 차량의 옆구리를 추돌하고 도망치는 뺑소니차량을 30미터 쯤 달려가 차량번호를 외워 신고해 뺑소니 범을 잡는데 기여한 한 바 있다.

그 음주운전자는 내 차량 말고도 다섯 번의 사고를 더 내며 도망을 가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그간 범죄자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거나, 교통사고 위험에 처한 사람, 도로 상황 등 수 없이 많은 신고를 했다.

가방에 호루라기를 가지고 다니다가 교통이 엉키게 되면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선량한 우리 서민의 몫이라 생각해 자처했다.

한 번은 화물차에 문화재로 보이는 석등 등 산소 앞 조형물을 솔가지로 가린 채 싣고 가는 것을 도굴한 것으로 수상히 여겨 신고한 적도 있고, 또 한 번은 TV 뉴스에서 교도소 탈주범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상황을 듣고 비슷한 인상착의의 사람을 신고한 적도 있다.
술 취한 사람이 도로 쪽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졸고 있는 것이 위험해 신고한 적도 있다.

그밖에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외국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어른들을 부축해 계단을 함께 오르거나, 무거운 물건을 함께 들어주는 등 나는 칭찬받자는 말은 아니지만 몸에 배인 선행을 하며 산다. 그런데 그런 나의 수많은 선행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사고 한 번 냈다고 피의자가 되어 똑 같은 잣대로 똑 같은 죄인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 젊은 경찰관은 내게 벌점 45점에 벌금 백만 원 이상을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입에서 욕이 나온다.


그간의 선행은 무용지물이란 말인가? 선행평가제(善行評價制)를 도입하자.


시민들의 선한 행동에 대해 점수를 부여하고 그 사람의 잘못이 있다면 정상을 참작해주는 제도를 실시하자. 그 사람의 평판이 삶의 도움이 되는 길을 열어보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선행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아무리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도 실수를 범할 때 똑같이 범죄인 취급을 받는다면 누가 나서서 땀 흘리며 아름다운 사회 만들기에 동참하겠는가.


<고려대 평생교육원 교수 김 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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