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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문학의 향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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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문학의 향취
  • 경도신문
  • 승인 2015.05.1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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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安南)이란 넓은 뜻으로는 베트남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당나라 초에 베트남의 북쪽과 중부의 지방에 두었던 안남 도호부(都護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좁은 뜻으로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이후의 중근(中近)지방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베트남 자신은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베트남에 대해 중국인이나 프랑스인 등이 부르는 이름이다.

또 19세기 후반에 프랑스가 베트남 식민지를 3분해 완조(阮朝)의 왕권을 인정한 중부지방을 보호령으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좁은 뜻의 안남은 통킹(Tongking)과 코친차이나(Cochin China)를 제외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해안 지방으로, 이곳은 안남산맥이 급한 벼랑을 이루어 해안에 임박하고 평야가 적다.

안남산맥(Annam山脈)은 인도차이나반도 동부, 베트남을 남북으로 꿰뚫고 동해안에 기대어 뻗힌 산맥이다.

화강암, 고생대의 사암석(砂巖石)과 석회암 등으로 된 지괴(地塊)산지이다.

통킹(Tongking)남부에서 남으로 뻗어 코친차이나(Cochin China)의 상자크 곶(S.Jacqes岬)까지 이른다. 구리와 아연 등의 광산이 있고 높이는 약 2,711m이다.

안남의 면적은 약 16만㎢이고 쌀·옥수수·면화가 생산된다.

해안에 좋은 항구는 얼마 없지만, 남부 만(灣)에는 관광지가 많이 있다.

안남산맥은 서쪽으로 밋밋한 경사를 이루고, 삼림과 아란 초원 지를 만든다.

모이제족(Moi諸族)들 이외에 여러 종류의 소수민족이 거주한다.

완조(阮朝)는 중부의 후에(Hue)에 도읍했기 때문에, 한때는 베트남의 중심지가 됐다.

1884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북베트남의 독립을 거쳤다.

그 후 1954년 제네바협정이래, 북위 17°선 부근을 경계로 남쪽의 월남과 2분됐다가 현재 1976년 남북이 통일돼 지금은 인도차이나 동부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됐다.

‘안남구이’ 는 옛날 안남 지방의 도자기를 일컫는다.

6세기경부터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은 중국식 그대로의 모방(模倣)이라고 할 수 있다.

청자류(靑瓷類) 화 고려(畵高麗)를 비롯해 백자(白瓷)와 황유(黃釉) 등을 견본으로 해 만들었으며 그 종류가 매우 많다.

일반적으로도 중국 도자기보다 매끄러우며 이국적(異國的)인 미(美)와 매력을 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안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쌀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안남미(安南米)이다.

안남인(安南人)은 통킹과 코친차이나의 평야지대에 사는 인종을 말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에 거주하는 남방계 몽고인족의 한 분파이다.

고대에 이주해 온 몽고인종이나, 현재는 복잡한 혼혈종이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며, 안남어는 타이 차이나어계에 속하는 것으로, 몬 크메르(Mon-Khmer)어적인 요소가 현저하다.

즉 베트남에서 가장 유력한 언어이다.

안남의 전부와 통킹의 대부분 및 캄푸치아의 일부에서 안남인들 간에 통용된다.

중국어의 영향이 많아 한자 및 그와 비슷한 문자·로마자로 표기한다.

몬-크메르족(Mon-Khmer族)은 이전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번영했던 몬족(Mon族)과 크메르족(Khmer族)이다.

인도지나 반도를 거쳐 남지나해로 흐르는 메콩 강(the Mekong)의 중·하류 지방 등에 거주했다.

이들의 몬-크메르어(Mon-Khmer語)는 오스트로아시아의(Austroasia語)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현재 인도차이나 반도의 몬족(Mon族)과 크메르족(Khmer族)들이 쓰고 있는 언어이다.

안남문학(安南文學)은 전한(前漢;B.C.2~1세기)에서 5대(10세기)까지 거의 10세기에 걸쳐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안남의 문학이다.

이것이 한문화의 영향아래서 발전하며 성장했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나 보나 당연한 경과이었다.

통설에 의하면 안남이 한학과 접한 것은 한나라 말기에 교지태수(交趾太守) 토왕(土王) 때부터라고 하나,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이른 것 같다.

교지로부터 중국에 흘러들었고, 이어 곧 한문학도 침투됐는데, 불교도 중국에서 왕성하게 되자 곧 교지까지도 그 영향이 미쳤던 것 같다.

교지는 중국 한나라의 군인데, 현재의 베트남 북부 통킹과 하노이 지방에 해당한다.

그 후 하노이에 도읍한 진조(1225~1413)를 거치면서부터 불교학은 일단 쇠퇴했으나 여조(1428~1527, 1533~1789) 때에는 한학의 최극성기가 출현했다.

특히 성종(聖宗)은 스스로 소단도원수(騷壇都元帥)라고 칭하고 문학의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과거(科擧)의 제도는 여러 번 변천하였으나 안남의 한학은 이 제도를 배경으로 해 ‘사서(四書)’ 와 ‘오경(五經)’ 에 집중됐고 중국과의 국교상의 도구로 만들기에 전념했다.

때문에 안남문학은 한시와 한문학의 형태로 그 범주에서 성장해 발달하게 됐다.


안남에서 안남어가 문자로 쓰여 지게 된 것은 진조(陳朝)때 한자를 이용해 추놈을 창시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 속자(俗字)가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자료는 1343년의 비문(碑文)이다.

그 후 17세기에 프랑스 선교사가 안남어의 로마자 표기를 시도했고 프랑스 치세하(治勢下)에서 국어의 자음을 국어(國語)로 해 신문이나 잡지 등을 발행하게 됐고, 동시에 종전의 문학이 전사(轉寫)됐다.

프랑스 문학의 번역과 서양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태서사상(泰西絲想)의 도입은 새로운 문학을 일으켰으며 종극에는 신구(新舊)사회의 충돌을 낳게 됐다.

동시에 프랑스어 보급은 또 하나의 다른 문학을 발생시켰다.

< (사)전자·정보인 협회 회장  나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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