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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대첩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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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대첩의 의의
  • 경도신문
  • 승인 2016.03.1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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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현(幸州縣)은 고려 때의 지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 의하면 경기도 고양(高陽)군에 있었다고 한다.

본래 고구려의 개백(皆伯)현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우왕(遇王; 王逢)으로 고쳐 한양(漢陽; 楊州)군 영현(領縣)이 됐다가 고려 초에 행주(幸州)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1018) 양주에 예속시켰다.

태종(太宗:1369~1422) 13년 (1413)에 고봉(高峰)과 억양(德陽) 2현이 합쳐서 고양시가 됐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사적 56호, 경기도 고양(高陽)군 지도(知道)면 행주내리(內里)에 위치하고 있다.
 
경의선 능곡역(陵谷驛) 동남쪽 약 3~5km쯤 한강에 돌출한 덕양산(德陽山)에 있다.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이곳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적군을 맞이해서 승첩(勝捷)한 고전장(古戰場)으로 유명하다.

성지(城址)는 산정(山頂)에 도축(土築)의 성벽을 두르고 그 중앙을 한층 높이 쌓는다.

다시 남단과 북단에서 사북방에 있는 골짜기를 도축의 성벽으로서 포용(包容)했다.
 
성내에는 백제시대에 속하는 많은 와편(瓦片)과 토기파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 축성(築城)한 시기는 백제시대(百濟時代:18 B.C~A.D. 660)를 기원(起原)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권율(1537~99)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어 승리한 싸움이 행주대첩(幸州大捷)이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됐다.

그 뒤 명나라와 합세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水原城)에 있다가 조선 제14대와 선조(宣祖:1552~1608) 26년(1593) 2월,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끄록 행주산성에 집결했다.

권율은 주방장(助方將)인 조경(趙儆)을 시켜 성을 쌓게 하고, 목책(木柵)을 만들어 대비시키는 한편, 병사(兵使:兵馬節度使) 선거이(宣居怡)는 금주(衿州;시흥)를, 창의사(倡義使:국난을 당해 의병을 일으킨 사람에게 임시로 주던 벼슬) 김천일(金千鎰)은 강화를,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김포)에서 각각 그를 지원·응원키로 했다.

1593년 2월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내습해 행주산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하루 동안 9차례에 걸쳐 맹공격을 가해왔다.

권율은 손수 물을 떠다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기를 돋웠고 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을 끼얹어 이를 막는 등 그야말로 치열한 싸움을 계속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까지 동원해 군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는데, 이 때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 석전(石戰)으로 적에 큰 피해를 입혔으므로 여기서 유래해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생기게 됐다는 설도 있듯이 당시의 전투는 죽기 살기의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시체를 네군 대로 모아 불사르고 퇴각했다.

권율은 패잔병을 추격하게 해 130여 명의 목을 베는 한편, 적의 대장인 우케다(宇喜多秀家)·이시다(石田三成)·요시카와(吉川廣家) 등에게도 큰 부상을 입혔다.
 
이 싸움은 김시민(金時敏:1554~92)의 진주싸움과 이순신(李舜臣:1545~98)의 한산섬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첨(三大捷)으로 권율 장군은 도원수(都元帥)가 됐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부터 98년까지 2차례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고니지 유기 나가(小西行長)·가꼬오.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을 시켜 15만 대군으로 부산과 다대포로 상륙해 침입해 왔으며 9000여 수군이 이들을 응원했다.

조선에서는 신입(申砬)·이순신·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휴정(休靜) 등이 나서서 대항했으매 조총(鳥銃)을 가진 왜군을 막지 못했고 역부족이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의주(義州)로 파천했으며 왜군의 부산 상륙 후 60일 만에 평양까지 함락되고 거의 무방비 상태인 국토는 함경도까지 짓밟히게 됐다.

뒤에 명나라의 원병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권율 등의 반격으로 왜군은 하는 수 없이 철수를 서두르게 됐다.

이 때 일본 측의 고니시가 강화회담을 제의해 왔고, 명나라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이 진척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5년 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가 결국에 가서는 결렬돼 96년(선조 30년) 왜군은 15만 대군으로 재침해 왔으니,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한다
.
재침해 온 왜군은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의 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싸움에서도 연이어 패해 더 이상 북진(北進)하지 못하다가 때마침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1597년(선조31년)에 총퇴각했다.

이에 퇴각하는 왜군을 대항해 이순신이 지휘하는 해군은 명량(鳴梁)과 노량(露梁) 싸움 등 여러 곳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옥봉(李玉峯)은 조선시대 걸출한 여류시인이다.

 정확한 생존연대는 지금까지 미상이다.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봉(逢)의 서녀(庶女)이며,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逢集)’이 ‘가림세고(嘉林世稿)’ 의 부록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저술로 알려진 ‘지봉유설(芝峯類說)’ 에 이옥봉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이웃에 사는 아낙이 소도둑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에 갇힌 자기 남편의 억울함을 탄원하는 글 좀 써달라고 이옥봉을 찾아 왔다.
 
일의 전말 사정을 듣고서 억울함을 탄원하는 글을 자세히 적고 나서 끝에 시 한 구절을 추가했다.

妾臣非織女 (첩신비직녀)郎豈是牽牛 (낭기시견우) ‘첩이 직녀가 아닐지 언데 어찌 낭군이 견우이리까’ 자기가 어여쁜‘베를 짜는 여자’가 아닌데 낭군이 어찌타‘소를 끄는 남자’가 되리오. 견우는 글자 그대로‘소를 끌다’가 되니, 소도둑을 재치 있게 풀이한 것이다.

이를 본 태수가 탄복하고 그 자리에서 그녀의 남편을 석방했다고 한다.

나 경 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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