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4-05-02 21:21 (목)
부여는 우리 땅
상태바
부여는 우리 땅
  • 경도신문
  • 승인 2015.12.06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여, 부여국은 기원전 1세기경에 퉁구스 계통의 부여족이 북만주 일대에 세운 나라를 말한다.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3세기 말 선비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크게 쇠퇴했고, 그 영토 대부분은 고구려에 편입됐다.

북만주란 중국 만주의 북부이다.

중국 북동부의 쑹화 강, 헤이룽 강 두 강이 흐르며, 대체로 궁주링에서 북쪽의 땅이다.

남만주 다시 말해서 중국 만주 지방의 남부, 곧 궁주링 이남의 땅을 가리킨다.

궁주링은 중국 지린 성 창춘 남서쪽에 있는 도시인데, 수수·콩의 집산지이며 군사적 요지이다. 한국 민족의 후방행렬 제사회 즉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의 조종이 북부여국이었다.

이 나라는 만주의 농안과 신경 부근을 중심으로 해 넓은 평야지대를 차지했다.

오곡을 생산하고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하고, 이미 철기 문화의 혜택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여의 어원은 지금까지도 자세치 않으나, ‘조선’ 과 같이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진 나라로, B.C. 2세기경에 이미 고대국가의 모습을 나타낸 것 같았다.

궁실, 성곽,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네 가와, 대사, 사자 등의 관직이 있었다.

네 가는 따로 사출도를 관장했는데, 중앙까지 합하면 오부였다.

그 중 큰 것은 수천호, 작은 것은 수백 호를 맡았고, 피치자 계급인 하호는 노예에 속했다고 한다.

제가의 직명은 목축시대로부터의 유제인 듯 보이며, 원시시대의 중요한 자본은 가축이었다.

가는 본시 고관을 일컫던 칭호 또는 족장의 뜻으로, 원시부족제에서 일종의 봉건형태로 변천했던 것 같이 추측된다.

제가와 소속 하호는 영주와 영읍과의 관계를 말한 것 같다.

하호는 원래 가난한 백성을 뜻하며 대개 생산을 담당하는 농노와 순전한 노예로 구성돼 있었으며 지배 계급의 경제를 지지해 주던 것이다.

산물에는 곡물 외에 명마, 적옥, 미주및 초유 등을 산출하고, 또 농경군민인 만큼, 추수가 끝난 후에 은력 정월에는 영고라는 제천 대회를 열었다.

도둑에게는 훔친 물건의 12배의 배상을 물리며, 남녀 간의 간음이나 부녀들의 투기를 더욱 배척해 그러한 사람은 모두 극형에 처했다.

부녀의 투기를 법으로 엄중히 금지한 것을 보면, 일부다처와 축첩제도가 일반적으로 행지고 있었던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그 풍속에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처로 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가족 상속과 관련을 가진 것이다.

이는 흉노 등 북방사회에서는 공통된 습관이었고, 왜인 사회에서는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복식제도는 국내에 있어서의 의복은 햇빛을 숭상해 백포의 웃옷과 외의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타향을 가거나 외국 여행에는 화려하고 찬란한 비단옷을 입었다고 한다.

대인이나 귀인들은 겨울에는 그 위에 흑백초피 담비 종류의 모피 등 여러 가지 모물의 덧옷을 가해 입고, 모자는 금·은으로 장식이다.

백의숭상의 풍속은 부여에서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 간에 공통되고, 지금도 우리 민속 중에는 아직도 남아있다.

부여의 상류층 생활에는 중국 예속의 영향을 받아, 음식에 조·두 를 사용했다.

또 연회에 있어 술잔을 씻어서 서로 공손히 주고받으며 오르고 내릴 때에 읍하고 사양하는 예절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과의 오랜 문화적 접촉과 교류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이 되며 책력에도 은력을 사용했다 한다.

다시 그 상장 장사 지내기와 삼년상을 치르는 일의 예속을 보면, 여름철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쓰고, 귀인에 대한 순장 왕이나 남편의 장사에 신하나 아내를 산 채로 함께 장사 함 의 풍속은 한위시대에까지도 이어져서 행했다.

많은 때에는 그 수가 백에 달한다 했고, 관을 쓰되 곽 관을 담는 궤, 외관은 없다고 했다.

또 그 속에는 지장의 풍속이 있어 정상이 보통 5개월에 미치는데, 남의 강권에 의해 장사 지내는 것을 예절로 알았다고 한다.

한·위시대의 부여는 지방이 2천리, 호수가 겨우 8만이라고 했으나, 정확한 숫자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부여의 주위에는 서로 선비, 동으로 읍루, 남으로 한의 현도군이 있어 서로 교섭이 잦았다.

하지만 침략을 일삼지 않고, 말하자면 경제적 호조건 하에 평화를 애호하고 평온과 태평을 사랑하던 국민이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국운과 문화를 유지하다가 서기 285년에는 선비족출신의 전연의 시조 모용외의 침략을 받아 왕이 자살하고, 그 자제들이 동으로 옥저에 피난하는 등, 일시 멸망하다시피 했다.

얼마 후에 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했으나, 선비족의 잇단 침공으로 점점 쇠퇴하다가, 후에는 고구려에 합병되고 말았다.

이때가 고구려 광개토왕 즉위 전후인 듯하다.

최근에 부여에 대한 새롭고 흥미로운 일종의 보고서가 나왔다.

부여는 아주 부유하고 13세기 중반까지 한 번도 이웃 나라의 침략으로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막강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와 가야도 부여에서 내려온 주민 집단이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발해도 부여의 후손으로 옛 부여지역을 회복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한다.

기원전 3세기부터 494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700년간 만주 지역에 굳건히 있었던 부여는 우리 고대사의 중심이자 원류였다는 것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부여의 강역이다.

현재 중국 헤이룽장 성과 지린성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금 중국의 동북삼성이다.

우리 민족을 형성한 예맥 족이 이룬 정치체제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 경 수
(사) 전자정보인 협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