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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과 낭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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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과 낭랑군
  • 경도신문
  • 승인 2015.12.2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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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衛滿)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창시자이다.

재위 B.C. 194~?, 중국의 온 천지가 어지러운 때에 조선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부왕(否王)의 부하로 있다가 후에 부왕의 아들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해 주위의 사방을 정복해 국토를 넓혔다.

그는 본래는 연(燕)나라 사람이라 한다. 위만조선은 B.C. 194~108년간 한국의 북쪽에 있던 나라였는데, 일명 위 씨(衛氏)조선이라고도 한다.

기자(箕子)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연인(燕人) 위만이 중국 한(漢)나라에서 유민(流民)과 함께 휩쓸려 들어와서 준왕을 쫓아내고 지금의 평양인근 왕검성에 도읍해 왕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나라의 반항을 막기 위해 한 나라와 결약(結約)하고 인국(隣國)인 임둔과 진번 등을 차례로 공략해서 병합해 한때 강성한 국가가 됐으나, 그의 손자인 우거왕(于渠王) 때에 한과의 결약을 지키지 않았다.

도리어 한의 진국(辰國)과의 통상(通商)까지도 방해했으므로 한의 무제가 공략해 옴에 패주해 결국 87년 만에 멸망했다.

그 멸망원인을 보면 우선 위만조선은 건국을 한나라 유민의 힘으로 성취했으며 지나치게 인근의 부족들을 토벌했기 때문에 민심을 잃어 백성의 반감을 사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라 원래 국가적 기초가 빈약했던 탓이라 하겠다. 위만조선은 한 때 정치, 경제, 군사 조직이 발달했고 당시 철제무기(鐵製武器)를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한사군(漢四郡)은 중국 한 무제(漢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없애고 그 땅에 설치한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네군을 말한다. 여기까지가 우리나라의 한사군에 대한 교과서적인 통설이다.

한사군은 B.C. 108년경(B.C. 108~107) 한(漢)이 한반도 북부에 둔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이다. 한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없애고, 대신에 그 일대에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했다.

낙랑군은 원래 위만조선 땅인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단 (淸州江 이남 慈悲嶺 이북), 진번군은 원래 진번국인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에 위치했다.

임둔군은 전의 임둔국인 함경남도  대부분 (地靑 이남)과 강원도 일부 (鐵原 이북)를 차지했다. 또한 현도군은 예·맥(濊貊)의 땅인 압록강 중류 동가긴 유역의 전에는 창해군(滄海郡)이 있던 곳이다.

위만조선의 제3대왕 우거(右渠)때 예맥의 군장(君長)이 우거를 배반하고 주민 28만 명을 몰고 한의 요동군(搖東郡)에 귀속했다.

그 후 B.C. 128년 한이 창해군을 설치하고, 수년 후에 폐지했다.

이것이 한의 동방 침략, 군현 설치의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한의 요동군 동북 도의 섭하(涉河)를 습격해서 살해하자 B.C. 109sus 무제가 수륙 양대 군을 보내어 위만조선을 침략 멸망시키고 그곳에 4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후 B.C. 82년에는 진번, 임둔군을 폐지해, 진번 북반과 임둔 남반부를 각각 낙랑, 현도군에 병합시켰다.

그 후 B.C. 75년에는 현도군이 예맥의 침공으로 그 중심지를 싱징라오청(興京老城)지방으로 이동했다. 앞서 낭랑, 현도군에 병합된 진번 북·남반부를 각각 낙랑의 남·동부 도위로 해 낙랑군이 25현을 관할하고 현도군은 2, 3현으로 축소됐다.

30년 (後漢 忠武帝  建武 6年)에는 동부도위 지역이 폐지됐고, 이어 원주민인 옥저(沃沮)와 동예(東濊) 등이 일어나  남부도위 지역도 일시에 황폐화됐다.

그리하여 1세기 중엽인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때 현도군이 다시 무순(撫順)으로 쫓겨 가게 됐다.

한편 후한 말 공손탁(公孫度)이 요동 태수가 돼 낙랑, 현도군을 지배하게 됐으며 탁의 아들 강(康)이 뒤를 이어 205년 경 낙랑 남부도의 의고지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했다.

고구려 미천왕 때(313)에 낙랑군을 없애고, 대방군도 여·제(麗濟)의 협공으로 소멸됐다.

그러나 북부 일부(北部一部)는 고구려에 병합됐고, 남부 대부분은 백제에 귀속됐다.
 
4군의 밑에 여러 현을 두어 군에는 태수(太守), 현에는 영(令)이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됐고, 지방은 자치를 허락했다.

산물, 노동력을 착취했고, 특히 소금, 재목, 철을 가져갔다.

한편 상인을 보내 교역을 장려했기 때문에 그나마 중국과의 문화 교류는 급속히 진행됐다.

4군 중 특히 낙랑은 420년간 존속하는 동안 한의 이민, 정치, 경제, 문화의 도입, 이식이 성행했다.

중국의 발달된 철기문화를 전달하고, 원주민과 주위 토착(土着) 사회에 많은 자극과 영향을 주어 찬란한 문화를 건설했다.

특히 장장 420년간의 낙랑시대에 꽃피었던 문화가 돋보였는데, 특히 이를 낙랑문화라 칭한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곳에 설치한 한 군현의 위치를 둘러싼 이른바 상고사(上古史)의 대한 논란이 근래에 와서 격렬하다.

한 군현의 중심인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것이지만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현재 중국의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분명히 요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군이 지금의 허베이 성 갈 석산 부근에 있었다는 것이 중국 사료에 역력히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방은 중국의 현재 동북공정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이에 대한 조직적이고 철저한 고증분석과 함께 제대로 연구돼야 한다.

나 경 수
(사) 전자정보인 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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