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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의 원인, 경과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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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의 원인, 경과와 의의
  • 경도신문
  • 승인 2016.11.1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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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阿片戰爭:the Opium War;1839~ 1842)은 아편으로 인해 영국과 중국(淸)간의 전쟁이었다.

아편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청조는 광주(廣州)의 한 항구에 한해서, 또 공행(公行;廣東13行)이라는 관허의 상인 길드에 한해서 외교무역을 행했다.

모든 외국의 무역은 18세기 후반 이후, 영국이 광주 무역의 중심이 됐다.

중국에서의 생사·차·도자기의 수출이 중요한 것이며, 영국은 약간의 모직물·향료 외에는 대량의 은으로 생사나 차를 사들였다.

특히 18세기 말 영국정부가 차의 수입세를 인하면서부터 끽다(喫茶)의 풍습이 국민 일반에게 보급됐고, 중국차인 홍차의 수입이 격증했다.

거기서 1832년까지 중국 무역의 독점권을 부여받은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의 면화와 아편을 중국에 수출함에 따라 차의 수입자금을 획득하려고 했다.

특히 회사가 전매제도 하에 중국인의 마음에 들게끔 차를 정제해서, 모험적인 민간상인에 매도해 중국에 밀수시킨 아편 량은 해마다 격증했다.

한편 1830년에 들어와서는 중국 측의 수지가 역전돼 중국의 은값이 등귀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본위화폐인 은가(銀價)의 등귀는 재정이나 상업에 실로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일상 동전을 사용하면서 이것을 은으로 환산해서 납세해야 되는 농민에게는 동전에 대한 은가의 비율의 양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관청 특히 군대에 있어서 아편중독 환자의 격증은 전제(專制)왕조에 있어서 크나큰 위협이 됐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도광제(道光帝)는 그때까지 유명무실화(有名無實化)했던 아편 금지령을 엄격히 실행하기 위해서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아편 금지론 자로 알려진 임칙서(林則徐)를 전권대신으로 광주에 파견하고, 밀수를 근절하려고 했다.

이미 무력적 위협을 포함한 강경책으로 영국 상인에게서 아편을 몰수한 일이 결국은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영국정부가 국내·외의 극심한 비난을 물리치고, 과감하게 아편문제로 재건한 이유의 하나는 아편 전매(專賣)수입이 인도재정에 매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처럼 아편 무역이 영국의 인도 지배에 불가결의 지위를 차지한 일 때문이었다.

아편에 의해 중국에서 얻어진 은이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오스트레일리아·중국·인도를 연결하는 세계무역의 균형을 유지하며 견제하는 유력한 수단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결국 중국은 영국의 아편 무역 자체를 끝까지 고수하고 합법화하는 필요성에 여지없이 눌리었다.

겹쳐서 1825년의 최초의 공황아래, 절실히 추구돼온 중국시장의 개념, 결국 연안 각 항구의 개항이나 무역에 대한 중국 측의 각종 제한의 철폐, 유리한 무역 조건이나, 무역상·군사상의 근거지의 획득 등의 요구를 일제히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840년 여름, 48척의 함선 4,100명의 병사가 탄 영국함대가 북상해서, 북경의 통로인 다구(大沽)·천진(天津)을 위협했다.

청조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대가로 철저한 항전파의 임칙서를 전쟁도발자로서 면직한 다음 굴욕스럽게 강화교섭을 청했다.

그러나 화평을 위한 초안은 쌍방의 불만으로 불발로 그쳐 급기야는 전쟁이 재개됐다.
다음 해 1만 명의 중원부대를 가세한 영국군은 양자강에 진입해 남경에 육박했다.

청조는 민중을 무장시켜, 장기에 걸친 게릴라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이를 수행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내심으로는 무장한 민중이 이민족 지배자인 청조까지 위협할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정규군의 군율은 부패일로(腐敗一路)이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저항다운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연전연패했다.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해서 영국군의 전 사상자가 단지 520명인데 비해 청조는 무려 2만 명에 달했다.

청조는 남경이 함락하면 황제의 권위가 크게 흔들릴 것을 두려워해 영국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수락해서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체결하게 됐다. 

다시 그동안 광주 교외의 삼원리(三元里)에서 영국군의 폭행에 분격한 수만의 촌민이 무기를 손에 들고 영국군을 포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반침략전쟁에 궐기하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엿보였다.

특히 광동(廣東)에서는 그 후 오랫동안 영국인의 입성(入城)을 철저히 거절하는 배영투쟁(背英鬪爭)이 계속됐다.

남경조약과 그 추가조약, 광주·아모이·복주·영파·상해 등 5구(區) 통상의 체결에 의해 중국은 영토의 일부 뿐 만아니라 통제나 사법상의 주권의 일부를 제한을 받았다.

덩달아 프랑스·미국도 영국을 본받아 각각 황포와 망하(望廈)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1844년 체결했다. 그것은 중국이 종속적인 나라의 하나로서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말려든 일이었다.

결국 영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각국에 공통의 공업제품의 판매시장으로 전락해 원료의 구입시장으로서 재편성된 것을 의미한다.

마침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수공업은 다시 랭커셔(Lancashire) 면포(綿布)에서 심한 저항을 보이고, 영국의 수출은 예기한대로 급속히 확대되지 못했다.

그리고 아편무역의 가일층에 발전에 의한 경제혼란, 청조의 위신의 여지없는 추락을 배경으로 때마침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동란이 일어났다.

한편, 아시아의 대국으로 자처하던 중국의 패전은 군소 아시아 제국에 큰 충격을 준 것도 사실로서 일본의 군국주의의 발흥도 이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고 사료된다.

나 경 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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