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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회·삼합회, 명나라 흥망사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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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회·삼합회, 명나라 흥망사와 더불어
  • 경도신문
  • 승인 2015.09.0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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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대 활약했던 비밀 결사. 18세기 후반에 포젠 에서 일어나 반청 복명 멸만흥한을 내걸고, 그에 동조하는 모든 당파가 제휴해 반청 배외운동을 벌임. 신해혁명 후 동남아시아의 화교 사회에 펴짐.

삼합회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청복명, 만주족을 무너뜨리고 한민족을 일으키자는 민족주의 운동을 목표로 중국 남부, 특히 광둥 지방으로 발전한 비밀결사.

천지회’멸만흥한이란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조를 쓰러뜨리고, 한족의 주체성을 회복한다는 뜻의 슬로건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래 한족에 의해 주창되었으며, 특히 신해혁명기에 혁명파나 민간의 회당이 이것을 특히 강조했다.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 청나라 말기의 반란(1850~64)이었다.

광시 성에서 봉기해 홍수전을 천왕으로 만들고 태평천국을 수립 멸만흥한을 제창했다.

크리스트교 사상을 중국 전통의 사회관에 결부시켜 남녀평등, 토지균분, 청조타도 등을 내세워 세력을 확대했으나, 내분이 일어나고 증국번 등의 연합군에게 패해 멸망했다.

근래 중국의 농민운동의 출발점이 됐는데, 일명 장발적의 난이라고도 한다. 신해혁명은 1911년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10월 우창 봉기로 시작돼 다음해 1월에는 쑨원을 임시대통령으로 하는 난징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혁명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북양군벌인 위안스카이와 타협해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취임했다.

천지회는 중국의 일종의 비밀결사단체인데, 삼합회 또는 삼점회 라고도 한다.

회원은 홍문이라고 자칭했다.

처음에는 청대초기에 화남에서 일어나 멸만흥한을 목적으로, 청안에 혁명세력을 도와 지하에서 활약했는데, 화교 사이에도 세력이 크게 퍼졌다.

삼합회는 중국 청 말에 활동하던 비밀결사였다. 명나라는 중국 왕조의 하나이다.

홍무원년(1368) 중국 남방의 주원장이 양자강 하류지대에서 일어나 그때까지 중국을 통치하던 몽고 제국인 원 제국을 북쪽으로 쫓아내고 나라를 건설한데서부터 시작된다.

실제적으로 국가가 멸망하기는 숭정 17년(1644)까지로서 약 276년 동안 존속했다.

그 후 명나라 황실의 일족이 남방으로 쫓겨 가서 약 17년간 명맥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명나라 300년간이라 칭한다.

한민족은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 북부지방을 외래 족에게 빼앗기었다.

그동안 요. 금. 원등이 일어났다.

가장 문제가 되는 지방을 연운16주 이었다. 이 지방은 10세기 이후 완전히 상실됐다가 이 때 다시 회복하고, 더 나아가 몽고 내부지방까지 내처 쳐들어간 것이다.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시조되는 태조(1368~1398)는 일개 평민으로 일어나 먼저 중국의 중부지방을 통일하고 건국칭제 했다.

북부 중국의 주인공이었던 몽고를 멀리 외몽고지방으로 쫓아내고, 다시 사천과 울남 등지를 정복 영토 안으로 편입했다.

동시에 오랫동안 한 민족이 몽고민족에게 억압당했던 만큼 태조는 집권하면서 국수주의를 주장했다.

후속에서 벗어나 전날의 한민족 고래의 풍속으로 환원했다.

성조는 내몽고 지방을 정벌했고, 다시 남해방면에 정화를 보내 남양 각지에 있는 작은 나라를 초무했다.

이것이 후일 화교들이 대거 남양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다음 인종과 경제 때는 국난시대로서 몽고를 원정하다가 잡혀 국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것을 ‘토목 보의 변 ’이라 한다.

다음에 헌종과 효종 때 일시 국세를 만회했으나 전날과 같은 활기찬 기력은 없어졌고, 안타깝게도 환관의 득세시대를 만들어 주었다.

다음 황제 세종은 재위 45년이라는 긴 세월을 치세했지만, 여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명나라의 난숙기로 되어가므로 작은 일에 쓸데없는 논쟁만 벌리는 등 과거 개국시대의 대찬 기상과 기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지방에 도적떼들이 성행하는 등 국가의 쇠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즉 황제 밑에서 왕권을 가리는 권신이 나타나 차단하고 사회를 혼란케 했다.

이것을 구제하기 위해 목종의 소강시대가 있었으나 큰 효과는 보지 못하고 신종이 그대로 계승했다.

끝으로 숭정제가 즉위하면서 전과 같이 기근과 병이 유행했다. 이로 인해 식량부족이 생겨 유적이 성하게 됐다.

이자성이 북경으로 쳐들어오자 관군은 이미 산하이 관에서 청나라 군대를 대비해 지키고 있었으므로 텅 빈 북경의 위기는 구하지 못했다.

숭정황제는 매산 으로 올라가 자책의 글을 남기고 처절하게 자살했고, 이로써 명조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다.

북경만 함락됐을 뿐이지 남쪽 중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명나라를 위해 충의를 표시할 사람들은 황실의 여러 왕을 등에 없고 다시 명나라를 세운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각 왕이 각지로 분산되는 등 명나라의 명운의 역사는 실제로 여기서 끝나게 됐다.

명나라의 국력은 초창기에 강성했을 뿐이며, 그 후로 내려오면서 차차로 약화돼 갔다.

전날의 화려한 시대는 다시 나타나지 못했다.

여기까지가 간단한 명나라의 흥망사이다.

나 경 수
(사) 전자·정보인 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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