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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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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의 흥망성쇠
  • 경도신문
  • 승인 2015.10.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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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중국 진한대 에 몽고고원에서 활약한 유목 기마 민족.

기원전 3세기 말기에, 묵돌선우가 모든 부족을 통일해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 국가를 건설하고, 최성기를 맞이했으나, 한의 무제가 자주 침공해 쇠약해져, 기원후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됨. 이중 북 흉노는 후한의 침공을 받아 서주해 유럽의 훈족이 됐다 함.

흉모 묵돌 묵돌선우를 흉노로서 일컫는 이름. 흉모 묵돌 북틀은 묵 돌의 이름으로 묵돌선우를 흉노로서 일컫는 이름 흉악, 무도한 사람을 비유한 말.

훈족아시아 내륙 지방의 기마 유목민. 중앙아시아의 스텝(대초원)지대에서 활약함.

4세기 중기에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에 침입함으로써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유발시켰음. 5세기 전반의 아틸라 왕의 전성기에는 아시아에서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음. 흉노와 동일한지는 분명하지 않음.

흉노는 B.C. 3세기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고고원과 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이며 또 그들이 형성한 국가의 명칭이다.

특히 주대에 중국의 북변을 수시로 위협했던 종족이었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B.C. 221년에 통일했을 때, 흉노의 연제 씨족의 족장 두만은 드디어 몽고고원의 제족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아들 모돌은 자기 부친을 죽이고 스스로 선우라 칭했다.

선우란 북아시아 유목국가의 군주가 가한이라 칭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칭호했다.

일반적으로 흉노의 ‘추장’의 칭호로 알려져 있다. 모돌은 남만주의 동호, 북방의 정령, 예니세이 강 상류의 키르기즈를 모두 정복했다. 서쪽의 월지를 격파해서 역사상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웠으며 이어서 산시 성 북부에 침입했다.

한나라의 고조유방은 북진해 이를 맞이해 장렬하게 싸웠으나 대동부근에서 완전히 포위돼 겨우 탈출했다.

그 후 한나라 황실의 딸을 선우의 아내로 맞이하고 매년 조공으로 많은 견직물, 술, 쌀 등을 흉노로 보낼 것을 조건으로 B.C. 198년에 화의를 맺었다.

그 후 흉노는 영토를 넓히어 오손과 동터키스탄의 오아시스 여러 나라를 지배하에 넣었다.

 이 결과 흉노의 지배권이 동으로는 열하로부터 서 동터키스탄에까지 넓혔으며, 북은 예니세이 강 상류로부터 남쪽은 오르도스에 까지 이르게 됐다.

흉노의 경제적 기지는 동터키스탄에 있었고 군수기지는 내공이고 오르도스에 있었다.

전자에서는 그 물산, 교통, 통상, 보호 세를 통치하고, 후자에서는 스키트시베리아계의 청동 기특히 무기류를 제작했다.

흉노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한나라의 무제 재위 B.C. 141~B.C. 87)는 흉노에 대해서 자주 원정군을 보내서 흉노를 괴롭혔다. 동시에 이를 동서로부터 협격할 생각으로 장건을 월지에 B.C. 139~B.C. 126년간 파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무제의 적극적인 정책 때문에 흉노는 외몽고를 피했고, 동터키스탄은 한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또 때를 같이해 정녕, 선 비등의 예속제족이 다투어 독립했다.

그런데다 흉노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B.C.54년에 5인의 선우가 나타나서 서흉노의 질지선우와 그의 아우인 동흉노의 호한야선우가 대립했다.

호한 야는 종극에는 한나라에 항복하고 그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질지는 키르기즈 초원으로 옮겼으나 B.C. 36년에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해 살해됐다.

그 후 흉노는 호한 야를 중심으로 부흥했고, 한나라와의 관계도 호한야가 왕소군과 혼인하는 등 한 때는 평온을 되찾았다.

불행하게도 내분이 일어나 2대째의 호한야선우가 후한에 항복했고, 이에 48년에는 호한야가 이끄는 남흉노와 북 흉노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남흉노는 감숙, 섬서, 산서 등에 분주해 중국의 북변, 서 북변 방면에 임하고 있었다.

서진의 내분을 타고 반란을 일으켰고, 오호십육국 중 한, 북량, 하를 건국해 점차 중국화 돼 갔다.

북 흉노는 때때로 중국을 침입하기도 했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고 선우가 살해됐다.

후한, 남흉노의 연합군이 91년에 그 본거지로 쳐들어감으로써 대패해 패주했으며, 이 결과 몽고고원에 있어서의 흉노라는 국가는 영원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 흉노의 잔당은 그 후 몽고고원에 세워진 선비, 또한 유연의 국가에 복속됐다.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진, 한을 위협하던 흉노의 자손이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불러일으킬 기회가 됐던 훈족이라고 전한다.

이 문제는 처음 학계에 제출 된지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확실히 해결되지 않았다.

흉노의 대개는 지배층의 서방이동과 훈족의 서방이동이 전연 무관계는 아닌 것과 훈이란 이름이 흉노에서 유래된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흉노의 인종에 대해서는 터키계, 몽고계, 아리아계 등 많은 설이 있으나 그 중에서 특히 터키계의 설이 유력하다.
 
최근에 흉노의 예니세이 강 유역에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이 있다는 설이 나왔으나 이것도 아직까지는 분명치 않다.

국가형태는 연제, 호연, 수복, 난, 구림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부족을 지배층으로 한 부족연합체로, 선우와 위는 연계 씨족에게 세습됐고, 알지라 불리었던 황후는 사실상 다른 4씨족에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국가를 구성한 제부족의 족장은 1년에 3회 선우의 본거에 모여서 샤머니즘의 제의를 행함과 동시에 국사를 의논했다.

조방한 유목과 수렵을 하고, 양, 말 등의 가축을 방목해서 하영 지와 동영 지와의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의 원형가옥에서 살았다.

예니세이 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굴된 한식궁전 은 흉노에게 항복한 한 나라의 장군 이릉의 것이라고 전한다.

또 코즐로프 일행이 노잉 안에서 발굴된 귀족의 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으로 보이나, 거기에서 스키트 시베리아 계의 문물 외에 견직물, 철기, 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돼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엿보인다.

나 경 수
(사) 전자정보인 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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