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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학 혁명의 맹아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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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학 혁명의 맹아와 의의
  • 경도신문
  • 승인 2015.10.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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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혁명은 1917~1918년에 있었던 호적과 진독수 등이 제창한 중국의 백화문학 운동이다.

1917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학혁신운동을 말한다.

종래의 문어문을 버리고 살아 있는 백화에 의한 문학을 창조하고자 중국의 사상가 후스(1891~1962)가 제창했다.

중화민국의 정치가, 사상가 천두슈(1879~1942) 등이 추진하고 중국의 작가 루쉰(1881~1936)이 소설 ‘광인일기’에서 실천했다.

이 언어 개혁은 문화, 사회의 변혁을 요구하고 이윽고 ‘신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문학을 오랜 전통 밑에 고문또는 5.7언의 시형식과, 그 형식에 깊이 젖은 정신에 오랫동안 속박돼 있었다.

그것은 유교적 의식에 젖어 있는 사대부계급의 일종의 보조적인 부속품으로서 그 지위를 보존해주고 옹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문자를 모르는, 즉 이러한 전통문학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일반 서민들 간에도 소설이나 연극 같은 새로운 문자 장르가 트여 있었다.

그것은 고문이란 전통을 떠나 ‘백화’ 로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문학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서민들이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사대부와 차별되는 것만 같았다.

이러한 문학에 대한 견해와 사고방식을 뜯어 고치려는 운동이 바로 문학혁명이며, 그 도화선은 호적에 의해 처음으로 불이 붙여지게 됐다.

1910년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호적은 1915년 여름에 친구들과 중국문학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다가 ‘문학혁명’이란 말이 부지중에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고 한다.

그것은 1912년에 고국에서 성공한 정치혁명의 영향이 컸다.

그러니만큼 크게 말해서 문화혁명이고, 사상혁명이며, 또 종국에 가서는 사회혁명으로 이어져 있었다.

호적에 의하면 ‘백화는 생문자이고, 고문은 반죽음의 문자이며, 백화는 고문과 대체돼야 하는 것이다.

만일 백화가 완전히 고문과 대체된다고 하면, 백화문학은 당연히 문어의 문학으로 대체 된다’라고 말했다.

호적은 이러한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 ‘문학개량 추의’라고 이름 지어 친구인 북경대학 문과 학장이었던 진독수에게 보냈다.

진독수는 그 당시 마침 잡지 ‘신 청년’ 을 편집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1917년 1월초 ‘신 청년’에 실었다. 그 내용에는 문학개량에 임해 먼저 착수해야 할 사상으로 다음과 같은 8개조를 들어 힘주어 설명했다.

첫째, 내용이 충실할 것. 둘째 고인을 흉내 내지 말 것. 셋째, 문법을 음미할 것. 넷째, 앓지도 않은데 신음하지 말 것. 다섯째, 흔한 말을 쓰지 말 것. 여섯째, 전고를 쓰지 말 것. 일곱째, 대구를 나열하지 말 것. 여덟째, 속자, 속어를 피하지 말 것. 전고는 전례와 고사, 또는 전거가 될 만한 옛일 곧 고실을 말한다.

대구는 대(對)를 맞춘 시의 글귀이다. 비슷한 어조, 어세를 가진 어구를 짝지어 대립의 격조를 맞추는, 수사법의 한 가지가 대구법이다. 속자는 정자의 대로서 세간에서 두루 쓰이는, 자획이 바르지 않은 한자를 말한다.

또 속어는 통속적으로 쓰이는 저속한 말, 속언이다. 아언, 즉 바르고 우아한 말을 뜻하는 아어와 대비된다. 속어는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을 의미하는 상말을 지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속담 또는 이언을 뜻하기도 한다.

고인은 옛사람이다. 이어서 2월호에는 진독수의 문학혁명론이 발표돼 ‘귀족문학을 타도하고 국민문학을 건설하라. 고전문학을 타도하고 사실문학을 건설하라.

산림문학을 타도하고 사회문학을 건설하라’고 외쳤다. 이에 호응해서 일어난 것이 북경대학의 전현동으로, 호적의 설을 널리 퍼뜨리고, 특히 ‘전고를 쓰지 말 것’의 1구절을 절찬함과 동시에 당시의 중국 구문화에 대해 심한 비판과 공격을 가했다.

이윽고 호적도 미국에서 귀국해서 북경대학 교수가 돼 ‘역사적 문학 관념론’과 ‘건설적 문학혁명론’을 발표해, 문학혁명의 필연성이나 문학에 의한 국어의 건설 등을 힘주어 논했다.

이들의 활동은 널리 진보적인 학자가 지식계급에 영향을 미쳐서 이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을 반기지 않는 사람도 개중에는 있었다. 특히 린 수 (1852~1924)같은 고문 작가는 극력 이에 반대했다. 그는 호적, 진독수, 전 현등 3인을 묶어서 풍자한 소설 ‘자생’을 썼고, 다시 북경대학 학장 차이 위만폐이(1868~1940)에게 백화를 즉시 금하라고 윽박질렀으나, 채원배는 사상자유의 원칙을 내세워 이를 일언지하에 일축했다.

이러한 운동은 이윽고 1919년의 5.4운동에 연계되고 흡수됐다. 당시 각 방면에서 일어난 중국의 문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나 반성에 대응해서 중국혁명의 완성에 크게 공헌했다고 후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 고문 또는 7.5언구의 시와 사대부 계급은 이렇게 쇠잔되고 멸망했으니 그 대신 새로운 찬란하고 힘찬 중국문학의 탄생을 보게 됐다.

나 경 수
(사) 전자정보인 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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